[글쓰기]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독서 지도와 아울러 글쓰기 지도 역시 가정에서 할 수 있는 중요한 교육활동 중의 하나이다. 글쓰기 능력은 사회적 성공에도 필수적이고 자기실현의 한 수단으로도 크게 유용하다. 가급적이면 어려서부터 글쓰기에 취미를 붙여 자기 나름의 세계의 자아화를 이루는 통로를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이 좋다. 일기, 편지, 독서 감상문 등은 초창기 글쓰기 공부의 좋은 학습장이 된다. 입문기 글쓰기 지도에 필요한 몇 가지 실제적 문제에 대해서 짚어보고 마지막에는 내가 평소에 많이 강조하는 ‘통째로 눈치껏’ 공부법에 대해서 한 마디 덧붙일까 한다. 


1. 주술호응과 설명의 기술 : 글쓰기 지도의 유의점 중 첫째가 주술호응(主述呼應)에 대한 각별한 주의(강조)다. 작문(作文)은 기본적으로 의미를 전달하는(공감대를 형성하는) 문장 만들기이다. 그 안에는 문법적 형식과 사회적 공유인식이 존재한다. 가장 기본적인 문법적 형식은 주부(主部)와 술부(述部)다. “누가 무엇을 한다.”, “무엇이 어떻다.”가 가장 기본적인 문장 형식이다. 하나의 주체는 하나의 설명 단위(술어가 여럿 있어도 의미상으로는 각각 독립적으로 주어와 연결되므로 1대1의 설명 관계가 성립한다)를 가진다. 주체는 있는데 술부가 없으면 비문(非文, 문법적 형식을 갖추지 못한 글)이 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미숙한 작문자들의 일반적인 특징이, 완결되지 않거나 생성중인 여러 생각들을 성급하게 한 문장 안에 다 담아내려 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머릿속 생각이 현실의 문장으로 내려오는데 어려움이 많이 생긴다. 학교에서 체계적인 글쓰기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는 옛날 어른들은 지금도 ‘자기 생각 위주의 글’을 많이 쓴다. 그분들의 글을 읽을 때에는 독자가 능동적으로 주술관계를 재구성하면서 읽어야 한다. 글쓰기 지도의 첫 단계는 그런 주술관계의 불일치와 착란을 꾸준히 제거해 나가는 것이다. 그 단계에서는 반복적으로 주술호응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2. 단문 위주의 글쓰기 : 글쓰기 공부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한 방편으로 보통은 단문(短文) 위주의 글쓰기를 강조한다. 또 형용사와 부사의 사용을 줄일 것을 권하기도 한다. “쉽게 읽히는 것이 좋은 글이다.”, “짧은 문장이 좋은 문장이다”라는 말은 작문교실에서는 거의 기독교 신약성경의 산상수훈(山上垂訓, 기독교 신앙의 근본 원리를 요약해서 전하는 말) 차원의 대접을 받는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와 같이 산상수훈도 단문 위주의 표현으로 되어 있다. 짧게 써서 자신의 생각을 다 전할 수 있다면 짧은 문장이 가장 좋은 문장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복잡미묘한 내용을 담고 싶을 때에는 부득이 문장이 길어질 수도 있다. 그때도 짧은 문장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글의 목적과 필요, 그리고 작문자의 능력에 따라서 글은 짧아질 수도 있고 길어질 수도 있다. 불필요한 수식을 줄인다는 것은 생각을 정리해서 요점을 전달하는데 좋은 수단이니 권장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표현(전달)의 묘를 살리기 위해서 형용사나 부사를 시적(詩的)으로 사용할 것을 요구하는 상황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럴 때는 과감하게 돌발적인 인상을 줄 수 있는 수식어들을 한 번씩 사용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 그러니 문장은 항상 짧게 쓰는 게 좋고, 뜻은 쉽게 전달되어야만 한다라는 강박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때그때 달라요!”라는 개그맨들의 우스개 소리는 글쓰기 공부에서도 통용되는 말이다. 모든 글쓰기는 예상(기대) 독자를 가진다. 어느 정도의 지적 수준을 가진 독자가 내가 기대하고 예상하는 독자인지를 잘 판단해서 그들에게 가장 선호될 내용과 형식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할 것이다. 


3. 설명이 관건이다 : 주술호응 공부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 다음에는 설명, 묘사, 서사, 논증 등 기술(記述)의 기술(技術)에 대해서 공부할 필요가 있다. 기술(記述)의 방법 중 설명에 대한 공부를 집중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 서정주 시인이 ‘자화상’이라는 시에서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라고 적었지만 글쓰기에서도 팔 할 이상은 설명의 영역이다. 설명, 묘사, 서사, 논증으로 보통 기술의 방법을 나누지만 묘사나 서사, 논증이 설명의 용도로 사용될 때까지 포함하면(이를테면 설명적 묘사, 설명적 서사 등) 글쓰기의 팔 할 이상이 설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만큼 설명이 중요하다. 설명 잘 하는 사람이 글 잘 쓰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설명을 잘 하려면, 원인과 결과를 밝혀 적을 수 있어야 하고, 적절한 인용과 예시를 사용할 수 있어야 하며, 동어반복이나 자명성(스스로 자기를 증명하고 있는 말을 다시 설명함)을 피할 수 있어야 한다. 글을 써 나가면서 그렇게 글을 쓰고 있는지 스스로 메타인지를 계속 가동해야 한다. 초기 단계에서는 강조를 위해서 의식적으로 사용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동어반복을 제거하는 훈련부터 하는 것이 좋다. 최소한 동일한 단어를 비슷한 단어로 교체하는 노력은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문장 이어 나가기의 어려움을 몸으로 느끼며 하나하나 몸으로 글쓰기 요령을 터득해 나가도록 해야 한다. 글쓰기는 생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 기술(技術)로 되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주술관계를 바로하고, 동어반복(자명성)을 해소해 나가는 과정만 제대로 이루어지면 일단 글쓰기 공부의 초입에는 들어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4. 전제와 결론이라는 세트 : 글쓰기 공부 중간 단계는 전제와 결론을 만드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로 묶어서 두 문장씩 쓰는 연습을 해야 한다. 이 과정은 글쓰기 공부가 프로(직업적 글쓰기)와 아마츄어(취미 글쓰기)로 나뉘는 결정적인 단계이므로 좋은 스승(본보기가 되는 텍스트)을 만나는 게 무척 중요하다. 좋은 모범을 보고 하나의 문장과 그 다음 문장을 세트로 만들어서 쓰는 연습(두 문장 이상을 쓰는 연습)을 반복적으로 해야 한다. 결론을 항상 윤리적으로 도출해야 한다는 딱딱한 생각은 할 필요가 없다. 딱히 도덕적 실천명제(올바로 삽시다!)나 반성적 사유(내 탓이오!)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지혜(처세), 진리(발견), 윤리(실천)'이라는 세 가지 범주 중 어디를 지향하는 것인지만 확실히 자각하면 된다. 맥락이 요구하는 결론(지혜, 진리, 윤리)에 순응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5. 비교와 예시, 백과전서적 인용 : 비교와 예시는 설명의 핵심적인 수단이다. 비교 잘 하고, 예시 잘 사용하는 사람이 설명 잘 하는 사람이다. 지식의 범위가 넓고 경험의 깊이가 깊은 사람이 비교와 예시에 능할 확률이 높다. 그러나 비교와 예시는 밖의 내용(지식)보다는 안의 내용(계시)이 불러올 때가 많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만큼 자아성찰이 중요한 곳이 글쓰기 세계다. 지식과 경험의 범위를 떠나서 자기가 아는 것 이상으로 절실한 비교와 예시를 할 수 있는 사람이 글 잘 쓰는 사람이다. 많이 아는 것과 글 잘 쓰는 것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글쓰기는 자신의 삶을 어느 정도 절실하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많이 달라진다. 소재와 주제를 다루는 태도가 곧 자신의 ‘삶의 태도’라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5. 통째로 눈치껏 학습법 : 글쓰기 공부에서 가장 중요한 공부법은 ‘통째로 눈치껏’이다. 언어는 본디 ‘통째로 눈치껏’ 학습되는 것이다. 언어 발달의 초창기 때에는 가히 폭발적으로 언어 습득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오직 ‘통재로 눈치껏’만이 유일한 공부법이다. 가장 피해야 할 것이 분절적(分節的), 단계적, 주입적 교수법이다. 내 ‘생각의 나무’를 키워서 글쓰기 능력을 향상시키겠다는 생각도 주의해야 할 공부법이다. 자칫 잘못하면 오해와 편견만 잔뜩 주입하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 특히 전문적인 교수법 공부를 하지 않은 학부모들이 자신의 생각을 아이들에게 주입하는 일은 가급적 피해야 한다. 십여 년 전에 시립도서관 평생교육사업의 일환으로 독서지도사 양성과정을 몇 년간 운영한 적이 있었는데 강의 초입에 항상 하던 말이 있었다. “내가 아는 것으로 집에서 내 아이를 가르치지 마라. 무엇을 가르칠지를 내게서 배워갈 생각을 하지 마라. 안 배우고 안 가르치는 것도 공부다”가 그것이었다. 몇 마디 말을 배워서 좋은 (가정) 교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비로소 교사가 되는 첫걸음을 떼는 것이 된다.


좋은 독서지도사, 좋은 글쓰기 교사가 되려면 우선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글쓰기 영역에서 좋은 교사란 누구인가? 첫째는 매일 매일 글을 쓰는 사람이다. 둘째는 보고 가르칠 교범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이다. 셋째는 ‘통째로 눈치껏’, 글쓰기 공부가 곧 창의력 신장 공부임을 아는 사람이다. 글쓰기의 융통성이나 유창성은 오직 ‘통째로 눈치껏’에 의해서만 습득되고 신장되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 참고 사항 : 생각으로 글쓰기 공부를 설명하려는 사람들은 글쓰기 교육에 ‘컴퓨터 모델’을 도입하려 애쓴다. 인풋과 아웃풋의 관계를 도식화할 수 있기를 바란다. 무엇을 집어넣으면 무엇이 나오는데, 이때 중앙 처리 과정은 이러저러하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글쓰기의 발달과정은 기초(입문), 숙달(심화), 통달(응용)의 과정을 거치는데 그것들의 세부적 단계와 구성적 절차는 이러저러하다고 말하기를 즐긴다. 그러나 그런 공부는 ‘글쓰기’에 대한 ‘머리 공부’일 뿐이지 정작 절차적 지식 일반에서 요구되는 ‘손(몸) 공부’는 되지 못한다. 글쓰기에 대해서는 (지식적으로) 많이 알지만 실제로는 글을 잘 쓰지는 못하는 공부가 될 공산이 크다. 내가 아는 국어교육학자 중에서도 저서는 많아도 자기 글을 못 쓰는 사람이 허다하다. 간혹 그들이 신문 같은 곳에 실은 칼럼을 보면 마치 딱딱하게 굳은 오래된 식빵을 씹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꽃으로 치면 조화라는 느낌이 든다. 

‘글쓰기 공부에 있어서의 분절적 사고’를 비판하고 있는 책이 있어 그 내용 중 일부를 옮겨 적는다. 브루스 맥코미스키(김미란 옮김)가 지은 『사회 과정 중심 글쓰기 : 작문교육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 벌린의 발견학습은 확립되어 있는 다양한 문화 연구 방법론에서 끌어온 것이지만, 그것이 학생들에게 광고의 문화적 의미 생산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도록 촉진하지는 못한다. 광고 분석과 특히 관련이 있는 벌린의 창안을 위한 발견 학습은 학생들이 텍스트가 어떻게 특정한 사회적 의미를 생산하는가를 확실하게 이해하도록 돕는다. 하지만 발견 학습을 이용하는 학생들은 광고(잡지, 텔레비전 쇼 등)의 기호학적 맥락이 어떻게 핵심 용어들의 함축적 의미를 조건 짓는지 혹은 이 맥락이 특정한 이항 대립이나 사회 서사를 환기시키기 위해 독자에게 미치는 영향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도록 자극받지는 못한다. 그리고 발견 학습을 이용하는 학생들은 핵심 용어, 대립, 서사(또는 이와 관련된 주체 위치)에 대한 특정한 비판적 입장을 정립하도록 고무 받지는 못한다. 바꾸어 말하면 벌린의 발견 학습은 배치 맥락의 기호론적 영향력이나 비판적 소비의 정치적 효력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문화적 의미가 어떻게 생산되는지 조사하는 ‘생산 비판(production criticism)’으로만 이어질 뿐이다. <브루스 맥코미스키, 『사회 과정 중심 글쓰기 : 작문교육 패러다임의 전환』, 김미란 옮김, 46-48쪽.>

 

위의 인용문에서 맥코미스키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글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대한 발견 학습적(부분적)인 이해’가 글쓰기 공부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생산론적 이해’에 그칠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맥코미스키의 강조가 아니더라도, 그런 분절적인 사고로는, ‘쥐 머리를 두드리는 것이 아니라 단번에 소 목을 베는’, 발견의 글쓰기를 깨쳐나갈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다. 인간의 두뇌(사고와 감정)는 말이나 글보다 항상 빠르게 움직인다. 그것을 말이나 글로 포착해서 그것의 이치를 살피고 다시 그것을 이용해 거꾸로 두뇌 활동을 발전시키는 방법(모형)을 찾아내겠다는 것은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복합적인 과정을 인정하지 않는 그 어떠한 설명도 작문 교육에서는 어불성설이다. 그런 것은, 글을 조금이라도 써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래서 현재까지는, 맥코미스키도 즐겨 사용한 것이라고 말한, ‘글 읽고 저자 따라 쓰기(read-this-essay-and-do-what-the-author-did)’가 가장 효과적인 글쓰기 공부법이다. 맥코미스키 역시 ‘작문의 세 가지 수준(텍스트적, 수사학적, 담론적)’이라고 해서 또 다른, 정교화 과정을 거친, ‘분절적 사고’를 시도하고 있지만 그 정도가 그리 심하지는 않다. 소설을 쓰고 싶으면 소설가의 글을, 시를 쓰고 싶으면 시인의 글을, 학문을 하고 싶으면 학자의 글을 많이 읽고 그것을 따라 쓰는 법을 익혀야 한다. ‘통째로 눈치껏’ 그들을 답습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견물생심(見物生心)’, 언젠가 내 안에서 남과는 다른 ‘글 욕심’이 나온다. 그때를 기다려야 한다. 자기 나름의 ‘견물생심’도 없이 글쓰기판에 그냥 뛰어들면(머리 공부만 하다 나오면) ‘소 목’을 베기는커녕 ‘쥐 대가리’도 때리기 힘들다. 성공한다고 한들 고작 누구의 아류에 머문 꼴을 보일 뿐이다. ‘통째로 눈치껏’, 세상을 사랑하며 ‘역지사지(易地思之)’하다 보면, 언젠가는 길이 열린다. 모세 앞에서 홍해 바다가 열렸던 것처럼, 내 안에서도 작지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다. 조급증 내지 않고, 묵묵히 좋은 글을 읽고 따라 쓰다 보면 반드시 길이 열린다. 그 길에는 왕도(王道)가 없다. 간절한 염원과 노력이 만들어내는 기적이 있을 뿐이다.


<오래 전 작성. 오늘 아침 일부 수정><사진은 페이스북(박황희 님) 사진>


출처: 페이스북 양선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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